“말(글)이란 뜻을 통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辭達而已)
孔子는 누구보다도 四字成語의 매력을 유감 없이 활용한 聖賢이었다. 말이란 뜻을 통하면 그만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切磋琢磨해서 玉처럼 빛나는 文彩를 자랑했음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어쩌면 그 또한 文質彬彬 ― 글의 뜻 못지 않게 形式도 중요한 요소임을 너무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는 징표이리라. 그러기에 공자는 내용이 꾸밈보다 앞서면 촌스럽고 꾸밈이 내용보다 앞서면 형식적이라고 하면서 조화와 균형을 강조해마지 않았을 터이다.
우리가 말을 주고받음은 意思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가령 ‘남경’하면 우리는 금방 ‘南京’을 연상할 수가 있다. 반면에 ‘난징’하면 웬만한 漢字실력의 소유자라도 ‘難徵’인지 ‘南京’인지 얼른 분간하기 어렵다.
이 경우 南京을 난징으로 읽었다면 앵무새 흉내일 뿐 아무런 뜻도 없는 단순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쓰는 베이징이니 시안이니 톈진이니 상하이니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불행히도 우리의 外來語 표기는 철저히 現地發音을 존중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合理的이기는 해도 合目的은 아니다. 앞서도 보았듯이 表意文字인 漢字의 경우 現地發音을 존중하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表音文字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이는 日本의 地名이나 人名도 마찬가지여서 ‘東京’을 ‘도쿄’로 읽으면 역시 無意味命題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名古屋’도 ‘나고야’ 대신에 ‘명고옥’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豊臣秀吉’을 ‘풍신수길’로 읽으면 무엇이 부족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러주어야 하는가 말이다.
한 때 日本의 王 칭호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대로 天皇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럴 수는 없으니 日王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었다. 이 경우 天皇으로 불러준다면 쓸개 빠진 일임은 물론이다.
이렇듯 우리의 言語生活에서 크고 작은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의 主體性이 박약한 탓이다. 英語公用論으로도 모자라 아예 美國의 마지막 州로 편입하자는 얼빠진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연코 外來語 濫用이다. 방송과 신문에서 얼마쯤 필요도 없는 外來語를 남용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라. 실로 오늘날 일상적인 외래어 사용은 온전히 言論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날마다 보고 듣느니 外來語투성이인데 어떻게 따라 쓰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사랑의 전화’하면 무엇이 불편해서 ‘사랑의 리퀘스트’여야 하는가? ‘書評面’하면 무엇이 안타까워서 ‘Book Review’라고 아예 영어를 들고 나와야 속 시원한가 말이다.
이러한 영어 남용은 親美事大主義의 단적인 징표다. 자고로 모든 事大主義는 言語事大主義를 그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漢字 사용도 문제 아니냐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漢字는 中國의 所有物이긴 하나 그보다는 오히려 韓中日 三國의 共用物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數千年 사용해서 이미 우리의 所有物이나 다름없고 또 漢字를 쓰지 않으면 당장 언어생활이 불가능한 형편이니 어쩌랴?
가령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쓴다면 北京을 베이징으로 쓰는 것만큼이나 無意味命題일 뿐이다.
요컨대 漢字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傳統文化이므로 한글과 漢字는 어느 한쪽이 없고서는 存在理由가 半減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유컨대 天地 男女 明暗 즉, 陰陽처럼 相互 절대적인 依存關係에 있는 셈이리라.
다시금 외래어 표기 문제로 돌아오자면 우리의 표기법은 정확에 정확을 기해 웃지 못할 寸劇을 연출한다. 가령 Thomas도 영국인은 ‘토머스’로 쓰는 반면에 독일인은 ‘토마스’로 적는다. 그러니 천주교에서는 스스로를 가톨릭으로 적는데 정부에서는 한사코 카톨릭을 고집하고 있을 게다. 그 이전에 천주교라는 말이 있으니 그렇게 쓴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발음을 정확히 적는 일은 물론 중요하기 하나 Robot는 ‘로봇’으로 적다가도 Trot에 이르러서는 ‘트롯’이 아니라 ‘트로트’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다. ‘아이러니’ ‘아이로니컬’은 또 얼마쯤 逆說的인가? 力說이라는 우리말이 있으니 ‘역설’ ‘역설적’이라고 쓰면 좀 좋으련만….
우리의 경우와는 天壤之差로 중국인들은 철저히 현지발음을 무시하고 자기들 편한대로 적고 만다. 가령 ‘코카콜라’도 ‘可口可樂’이러고 발음과 뜻을 생각해서 대충 적는다. 샌프란시스코‘를 ’桑港‘이라고 적고 마니 나머지는 일러 무엇하랴?
한마디로 현지발음에 급급함은 남이 장에 간다니까 거름지게 지고 나서는 격이다. 남이 달밤에 체조한다고 우리도 따라서 해야 할까? 프랑스인들은 ‘Patis’를 ‘파리’로 읽는데 비해서 미국인들은 ‘패리스’로 읽는다 말하자면 현지발음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읽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외래어는 자신들 편한대로 읽으면 그만이지 현지발음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도 없다. 도대체 우리가 외국의 현지발음을 존중해준다고 해서 그들도 우리의 발음을 존중해주는 일이 있었던가?
현지발음을 尊重하다면서 中國은 어찌하여 ‘중궈’라고 읽지 않는가? 日本 또한 ‘니혼’으로 불러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蒙古는 ‘몽골’로 읽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語文政策이 無原則하니 원대한 政策과 展望의 결여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모두들 제 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기에 ‘바보’니 ‘無腦兒’니 하는 조롱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일 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北京’을 ‘베이징’이 아닌 ‘북경’으로 읽었음은 우리 先祖들의 主體性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던들 저 滿洲族들이 자신의 언어를 잃고 흔적도 없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렸듯이 우리도 中國에 흡수되고 말았을 게다.
이처럼 말과 글이란 우리의 정신과 얼, 換言하면 主體性이요, 文化 그 자체다. 우리가 英語를 일상적으로 쓰면 쓸수록 우리는 그만큼 美國人이지 韓國人은 아니다.
요컨대 이 세상 모든 위기는 항상 主體性의 위기가 그 본질이다. 1997년의 外換危機만 하더라도 일어난 현상은 金融의 恐慌狀態였지만 그 본질은 주체성의 위기 즉 精神의 恐慌이었다.
오늘날의 경제 침체만 하더라도 무엇이 다르랴? 정신 없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경제가 좋아지는 일이 가능하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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