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는 김정일이다. 신뢰할 수 있는가.

상대는 김정일이다. 신뢰할 수 있는가.

任午年 歲募에 남기는 글
金   昌   順 (북한연구소 이사장)	筆者 略歷   내외문제연구소 초대소장/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 특별연구원/   고려대, 서강대 정책과학대학원 객원교수/   한국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   (現)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북한탈출동포돕기운동본부 부회장/북한연구소 이사장     著書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5권/   김일성체제의 북한사적 의미/ 북한15년사/   북한학기초(김창순북한연구전집) 1~12권 외 다수
Ⅰ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한국과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에서는 민족공동체이지만 국가적 존재로서는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K)이기 때문에 국민공동체로서는 하나일 수 없다.   이 지구상에는 하나의 같은 민족이면서도 두 개 이상의 국민공동체로 갈라져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는 북미주의 영국인들은 영국민족이면서 영국국민이었지만 지금은 국민으로서는 미국국민이다.   우리 민족의 국민사적 기원은 4천여년 전으로 소급한다.   1천3백년 전에 3국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단일민족으로 동일언어와 문화를 갖는 단일의 정치적 및 사회적 실체로서 존재해 왔다.   즉 민족공동체와 국민공동체의 단일화를 이루었다. 1민족 1국가의 이상적 인간집단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나는 지난 4월 잠깐 미국을 다녀왔다. LA에서 그곳 교포사회의 유지들이 "북한에 살던 사람들 가운데 1천만에 가까운 동족이 공산당 치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고 남한으로 피난해 와서 산다지요? 그들은 남한에 와서 이북5도청도 가지고 또 各道民會조직도 가지고 있다면서요? 그런데 이렇다할 반공청년단 하나도 키우지 못하고 반공정당도 세우지 못하고 산다는 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공산당이 싫다고 남한으로 도피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말 좀 해 보시죠"라고, '논쟁에의 초대'도 아닌 자리인데, 논조가 사나웠다. 나는 한마디로 "할 말이 없소이다" 라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언제 기회가 있으면 이 시대를 사는 여러 사람들의 민족적 양식 앞에 이 장면을 公論에 부치리라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껏 적절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Ⅱ   탈냉전의 世界史가 점차 본격화되면서 현 단계의 역사 마디(節)가 만들어내는 변화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운명과 무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도 세계화의 변화에 동참하면서 또한 역사와 더불어 전진하는 적극적 민족주의의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남과 북의 끼리끼리의 방도를 찾아서 기묘한 대립구조의 존재양식을 모험하는 제3의 길 곧 민족좌파의 길을 택하느냐의 역사적 분기점에 서게 됐다.   전자는 자유민주진영의 전략적 定型이고 후자는 북한의 작용이 주류가 되는 전략적 定型이다.   위에서 적극적 민족주의라고 규정한 것은 右傾도 左傾도 아닌 진정한 중심적 민족주의를 말한다. 여기서는 단순한 중립주의와 類를 같이하지 아니한다.   이처럼 탈냉전시대의 민족주의의 유형과 노선을 정립하는 것은 정치 사상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선문제 규정에서 정치적 오류를 범하게 되면 민족분열시대의 가장 중심적 민족주의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둔다.   12월 19일의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들 사이에 이념과 노선문제를 가지고 일응 많은 설전을 벌이고 있는 줄 안다.   선거전략상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민주적 정치전선에서는 마다할 것이 못된다. 다만 민주전선을 악용하는 음모성은 모든 유권자들이 엄중 경계해야 한다. 이 점은 북한의 소위 상투적 '북풍' 따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Ⅲ   임오년 세모에 남기는 글이니만치 무슨 그럴싸한 문장은 없을까. 문득 내 연구실의 동쪽 벽에 걸려있는 휘호 한폭이 생각난다.   "一樹梨花色不同 難將此意問東風"이란 글이다.   나는 이 글을 우리말로 "한 그루의 배나무 꽃이 색깔이 같지 않구나. 그 뜻이 크게 (무척) 어려워서 '東風'에나 물어보자"고 음미해 본다. 얼마나 멋진 한 폭의 漢詩인가.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한그루의 배나무로 형용하면서 흰 배나무 꽃이어야 할터인데 색깔이 같지 아니하니 기이하기가 짝이 없다고 해학을 털어놓고 있다.   漢文에 조예가 깊지 못한 본인은 이 글의 후단에서 "東風에 물어보자"고한 부분을 "우리 북한연구소에다 물어보자"는 식으로 멋대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주인이 누군가를 밝힌다면 중국의 저명한 영문학자 徐存堯 박사이다. 徐박사가 우리 북한연구소를 방문하고 돌아가서 이 휘호를 자신의 제자를 통해 보내준 것이다.   여기까지로 말을 끝내면 별로 말거리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어지는 말거리가 깊은 의미를 지녔다.   즉 본인은 20여년도 전인 초동에 전라도 光州에 사는 淨光스님으로부터 "一樹何花色不同 難將此意問東風"이란 휘호를 사람을 통해 전달받은 일이 있다.   앞에서 徐存堯 박사가 보내준 휘호의 문장과 글자 하나만이 다르고 그 밖에는 同一하다. 곧 徐박사는 '一樹梨花'라고 했는데 淨光스님의 그것은 '一樹何花'라고 했다.   淨光스님의 문장을 나는 "한그루의 나무 꽃이 어찌하여 색깔이 같지 아니한고. 그 뜻이 하도(크게) 어려워서 東風에나 물어보자"는 식으로 吟味하고 있다.   후일 나는 이 휘호를 액자에 담아 전해 온 그 사람더러 淨光스님의 自作詩文이냐 아니면 딴사람의 作品을 글씨로만 옮겨 놓은 것이냐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하도 오래 된 일이어서 확인은 할 수 없으나 그 詩文은 雩南 이승만 박사의 원작이었다고 전해들은 기억이 몽롱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여기에 이르러 더욱 미스테리에 빠지는 것은 雩南과 徐박사가 어떻게 그 시문을 다같이 알고 있었는가의 사실이다.   혹시 어느 漢詩帖에 一樹何花 혹은 一樹梨花 云云의 문장이 있었던 것 아닌지. 그리하여 그것이 살아있어 오늘날의 한반도 분단을 절묘하게 형용하는 시문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환상 같은 추상을 해 본다.   Ⅳ   壬午年 세모에 남기는 글을 쓰기로 했으니, 이번에는 중국인들 사회에 널리 알려진 생활의 지혜 가운데서 名句 하나를 찾아보기로 한다.   오늘을 사는 중국인들 사회에서 다소의 교육배경을 가진 사람들 특히 중국공산당의 당원생활을 한 사람들은 周恩來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存異求同'이란 名句와 周恩來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한다.   '存異求同'은 글자 그대로 "너와 나와는 한사람의 존재로서는 서로 다르지만 단지 다르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다투고 싸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그 사실 속에서 共同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성과 남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르지만 다르다는 그 사실만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싸우면 거기서는 생산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 다르다는 그 사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공동의 이익을 찾는 것이 천하를 태평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중국은 漢族이 지배민족이지만 55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복합민족국가이다. 이토록 많은 여러 민족들이 서로 다르다는 그 사실만을 가지고 다투게 되면 그 속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93년에 北京에서 중국인 노인과 환담을 즐긴 적이 있다. 그 노인은 周恩來를 극구 찬양했다. 이 노인의 주장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역설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다르니까 계급투쟁을 하라고 역설했지만 서로 다르다는 그 조건만을 가지고 싸우면 거기서는 무슨 생산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不和의 空論은 생활적으로 믿지도 실천도 안한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계급투쟁을 부인하는 중국인의 공산주의를 이 노인의 말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이 주장의 지도자가 바로 중국인들 생활에서는 周恩來로 알려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다소의 교육배경을 가진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담화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相異하다고 그것만을 이유로 싸우는 것을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은 타국과의 정치 외교 면에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중국과 미국이 서로 다르다고 싸우기만 하면 그 속에서는 아무 이익도 가치도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중국은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장장 165회의 대사급 회담을 통해 중공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었고 미국은 철의 장막을 헤치고 공산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얻어내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교섭은 참으로 첨예했다. 미국은 당연하게도 유엔이 수행하는 한국전쟁에 중공이 왜 대병력을 동원하여 참전했느냐고 따졌다.   이에 대하여 중공은 미국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공해 오니까 중공은 변강의 안전을 위해 지원군 명목으로 자위목적의 출병을 한 것이라고 맞섰다. 그렇다면 피차의 진심이 투명해졌으니 오해를 풀자고 악수한 것이 미·중 수교였다.   우리도 어차피 대화로 북한과 교섭하고 평화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양자간의 관계를 진심을 가지고 풀어야 하는 것이 正道이다. 그러자면 왜 남침했느냐고 물어야 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대화는 아무리 해봐도 소용이 없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정신적 혼을 담은 신뢰의 승리여야 한다. 지금 상대는 김정일이다. 신뢰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