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半島 運命의 瞬間
한자는 외기, 쓰기, 읽기, 모두 어렵다?
반세기를 급진 어문학자들의 선동에 속아왔습니다.
▣ 한자는 컴퓨터가 씁니다. 손으로 끼적이며 외우던 서당식 쓰기공부시대는 끝났습니다.
▣ 한글 기호더미에 그림 같은 한자를 섞어 국한혼용문으로 만들어야 읽기가 빨라집니다.
▣ 한글전용 강제시행은 교육전반에서 국민을 “학교 나온 무식꾼” 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본란 2010년 3월 18일자 < 과잉 어문개혁을 역 개혁하자 > 참조
< 저희가 애쓰고 있는 일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
① 최신 시사노설문을 국한문으로 고쳐 매일 한 편씩 공개하고 있습니다.
(3급(1,800자) 이상 독해능력을 갖춘 분의 읽을거리로, 학습용 부교재로 제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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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메일 주시는 분에게 국한문 초보자용 교재를 매주 두 차례 무상으로 보내드립니다.
(한자를 4급(1,000자) 이상 떼시고 논설공부를 시작하는데 요긴한 독습용 교재입니다.)
연락 주실 곳 국한혼용문보급회 kukhanmoon@korea.com
- 오늘은 긴 글입니다. -
------------------------------- 국한혼용문 페이지. ---------------------------------
(아래에 순 한글면 추가)
(2039) 韓半島 運命의 瞬間 난이도 = 4급 1,000 자를 초과한 한자 수 (45)
10年 前인 2000年 10月 올브라이트 美 國務長官이 平壤에 갔다. 그 歷史的인 訪問을 取材하기 爲해 國務部 出入記者團도 平壤으로 날아갔으며 워싱턴 特派員이었던 나도 그들과 같이 갔다. 北韓은 10萬 名을 動員해 大同江 綾羅島 競技場에서 ‘百戰百勝 朝鮮勞動黨’이란 매스게임을 公演했다. 金正日 委員長이 入場하자 巨大한 喊聲이 늦가을 밤하늘을 찢어놓았다. 나의 案內員도 벌떡 일어나 熱心히 소리를 지르며 拍手를 쳤다. 그는 나를 意識하는 것 같았다.
30m쯤 앞에 金正日 委員長이 앉았다. 오른쪽에는 올브라이트 長官, 왼쪽에는 웬디 셔먼 對北調整官이 앉았고 白堊館·國務部 官吏들도 함께했다. 金 委員長 등 뒤로 拳銃을 찬 警護將校 2名이 서있었는데 눈매가 毒蛇처럼 매서웠다. 매스게임의 主題는 金日成·金正日 讚揚, 核開發을 暗示하는 核分裂, 長距離 미사일 發射 成功 等이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軍人 數百 名이 帶劍을 꽂은 銃으로 銃劍術을 하더니 갑자기 本部席을 向해 “와” 喊聲을 지르며 數十m를 突進해 왔다. 카드섹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건드리는 者, 이 行星 위에서 살아남을 者 없다.”
그로부터 10年이 흘렀다. 그동안 北韓을 改革·開放으로 이끌기 爲해 韓國과 國際社會는 和解·包容 政策을 폈다. 그러나 北韓은 徹底히 欺瞞했다. 共産主義者는 테이블 위의 손과 테이블 밑의 발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 二重性에서 北韓은 가장 雄辯的인 存在다. 제네바 核 凍結 合議, 6者會談, 南北頂上會談은 結局 모두 제스처에 不過했다. 그들의 속내는 體制維持와 核開發을 爲해 時間과 달러를 버는 것이었다. 그들은 充分히 벌어 核武裝에 成功했다. 韓國과 國際社會는 北韓에 바람을 넣으려 했으나 徹底히 失敗했다. 北韓은 왜 바람을 拒否할까. 같은 共産國家인 中國과 蘇聯은 改革·開放에 成功했다. 北韓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1980年代 中國의 改革·開放을 이끌었던 이는 덩샤오핑이다. 그가 金日成과 다른 點은 偶像崇拜와 腐敗가 없었다는 것이다. 萬若 덩샤오핑 權力에 偶像崇拜와 腐敗가 있었다면 89年 6月 天安門 民主化 示威가 革命으로 發展했을지 모른다. 軍隊가 示威隊를 流血 鎭壓해도 人民이 蜂起하지 않은 건 덩샤오핑의 道德性이 健在했기 때문 아닐까. 고르바초프는 蘇聯의 마지막 共産黨 書記長이자 첫 大統領이었다. 85年 書記長에 選出된 後 그는 改革과 開放을 先導했다. ‘鐵의 帳幕’ 蘇聯에서 그가 冒險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亦是 偶像崇拜와 腐敗가 없었기 때문이다.
金日成-金正日 世襲政權은 덩샤오핑이나 고르바초프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을 修正主義라고 非難하면서 北韓式 社會主義를 固執했지만 北韓은 改革·開放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그들에겐 偶像崇拜와 腐敗라는 致命的인 脆弱點이 있다. 改革으로 市場經濟가 導入되고, 開放으로 外部의 文物이 流入되면 人民은 世上의 眞實에 눈을 뜨게 된다. 人民이 偶像崇拜의 虛構를 깨닫고 腐敗에 憤怒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北韓 政權은 構造的으로 改革·開放이라는 소프트 트랙(soft track)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天安艦 事態는 그런 孤立政權의 마지막 몸부림일지 모른다. 9·11 以前과 以後가 다르듯이 天安艦 以前과 以後도 달라야 한다. 이제 韓國은 北韓政權의 宿命的인 限界를 直視해야 한다. 金正恩에게는 權力과 함께 偶像崇拜와 腐敗도 世襲될 것이다. 3代 世襲政權에 改革과 開放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韓國은 어떻게 해야 하나. 韓國은 冷嚴한 現實 위에서 對北支援·急變事態, 그리고 統一에 對한 政策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도 곧 變하겠지”라는 幻想은 白翎島 바다에 묻어야 한다. 天安艦은 많은 걸 말해주고 있다. 悽絶하게 찢어진 그 배는 韓半島에도 運命의 瞬間이 곧 닥칠지 모른다고 말해주고 있다.
中央 100426 [時時刻刻] 김진 論說委員 政治專門記者
(國漢混用文普及會 kukhanmoo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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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운명의 순간
10년 전인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에 갔다. 그 역사적인 방문을 취재하기 위해 국무부 출입기자단도 평양으로 날아갔으며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나도 그들과 같이 갔다. 북한은 10만 명을 동원해 대동강 능라도 경기장에서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이란 매스게임을 공연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입장하자 거대한 함성이 늦가을 밤하늘을 찢어놓았다. 나의 안내원도 벌떡 일어나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는 나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30m쯤 앞에 김정일 위원장이 앉았다. 오른쪽에는 올브라이트 장관, 왼쪽에는 웬디 셔먼 대북조정관이 앉았고 백악관·국무부 관리들도 함께했다. 김 위원장 등 뒤로 권총을 찬 경호장교 2명이 서있었는데 눈매가 독사처럼 매서웠다. 매스게임의 주제는 김일성·김정일 찬양, 핵개발을 암시하는 핵분열, 장거리 미사일 발사 성공 등이었다.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군인 수백 명이 대검을 꽂은 총으로 총검술을 하더니 갑자기 본부석을 향해 “와” 함성을 지르며 수십m를 돌진해 왔다. 카드섹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건드리는 자, 이 행성 위에서 살아남을 자 없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기 위해 한국과 국제사회는 화해·포용 정책을 폈다. 그러나 북한은 철저히 기만했다. 공산주의자는 테이블 위의 손과 테이블 밑의 발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 이중성에서 북한은 가장 웅변적인 존재다. 제네바 핵 동결 합의, 6자회담,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모두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들의 속내는 체제유지와 핵개발을 위해 시간과 달러를 버는 것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벌어 핵무장에 성공했다.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에 바람을 넣으려 했으나 철저히 실패했다. 북한은 왜 바람을 거부할까. 같은 공산국가인 중국과 소련은 개혁·개방에 성공했다. 북한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이는 덩샤오핑이다. 그가 김일성과 다른 점은 우상숭배와 부패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덩샤오핑 권력에 우상숭배와 부패가 있었다면 89년 6월 천안문 민주화 시위가 혁명으로 발전했을지 모른다. 군대가 시위대를 유혈 진압해도 인민이 봉기하지 않은 건 덩샤오핑의 도덕성이 건재했기 때문 아닐까.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이자 첫 대통령이었다. 85년 서기장에 선출된 후 그는 개혁과 개방을 선도했다. ‘철의 장막’ 소련에서 그가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우상숭배와 부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일성-김정일 세습정권은 덩샤오핑이나 고르바초프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를 고집했지만 북한은 개혁·개방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그들에겐 우상숭배와 부패라는 치명적인 취약점이 있다. 개혁으로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개방으로 외부의 문물이 유입되면 인민은 세상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인민이 우상숭배의 허구를 깨닫고 부패에 분노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 정권은 구조적으로 개혁·개방이라는 소프트 트랙(soft track)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천안함 사태는 그런 고립정권의 마지막 몸부림일지 모른다. 9·11 이전과 이후가 다르듯이 천안함 이전과 이후도 달라야 한다. 이제 한국은 북한정권의 숙명적인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김정은에게는 권력과 함께 우상숭배와 부패도 세습될 것이다. 3대 세습정권에 개혁과 개방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은 냉엄한 현실 위에서 대북지원·급변사태, 그리고 통일에 대한 정책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도 곧 변하겠지”라는 환상은 백령도 바다에 묻어야 한다. 천안함은 많은 걸 말해주고 있다. 처절하게 찢어진 그 배는 한반도에도 운명의 순간이 곧 닥칠지 모른다고 말해주고 있다.
중앙 100426 [시시각각] 김진 논설위원 정치전문기자
(오.탈자가 보이시면 가르쳐주십시오. kukhanmoon@korea.com)
http://blog.daum.net/kukhanmoon/420